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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장지동(저) 이병인 편역/ 장지동, 교육에서 청나라의 미래를 찾다:권학편의 구상과 학무강요의 실천(한울아카데미, 2023)

작성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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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중국근현대사학회 연구총서 간행사
    책을 엮으며

    제1부 장지동과 교육개혁 _이병인
    제1장 장지동의 구상과 그 유산
    제2장 『권학편』의 국가 중건 구상과 문화 전환
    제3장 장지동과 계묘학제

    제2부 『권학편(勸學篇)』 _장지동
    서문

    권학편 상, 내편
    제1장 단합된 마음 /同心
    제2장 충성심 교육 /敎忠
    제3장 윤리 확립 /明綱
    제4장 정체성 인식 /知類
    제5장 판단의 기준, 경전 /宗經
    제6장 국가권력 확립 /正權
    제7장 배움의 순서 /順序
    제8장 학문의 핵심 학습법 /守約
    제9장 아편 근절 /去毒

    권학편 하, 외편
    제1장 지혜 증진 /益智
    제2장 유학 /游學
    제3장 학당 설립 /設學
    제4장 학제 /學制
    제5장 번역 진흥 /廣譯
    제6장 신문 열람 /閱報
    제7장 제도 개혁 /變法
    제8장 과거제도 개혁 /變科擧
    제9장 농학ㆍ공학ㆍ상학 /農工商學
    제10장 군사학 /兵學
    제11장 광업학 /鑛學
    제12장 철도 /鐵路
    제13장 회통 /會通
    제14장 군축론 비판 /非弭兵
    제15장 종교적 관용 /非攻敎

    제3부 계묘학제(癸卯學制)의 「학무강요(學務綱要)」_장백희ㆍ장지동ㆍ영경

    편역을 마무리하며
    참고자료 1 『권학편』에서 인용한 서적 소개
    참고자료 2 『권학편』에서 언급한 인물 소개
    찾아보기
 

책 속으로

『권학편』은 청 말의 상황에서 출현하고 중국근대사에 영향을 끼친 저작이지만, 장지동이 직면했던 중국 전통 문화의 보존과 전환, 혹은 폐기란 고민은 현재의 중국에서도 여전히 지속되었다. 장지동이 공자의 가르침이 사라질까 고민했다면, 이제 자신감과 경제적 부흥을 달성한 중국은 역으로 중국 문화를 보편적 문화로서 확장시켜 현대 국가의 문화로서 자리 잡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_28쪽/ 제1부 제1장_ 장지동의 구상과 그 유산

장지동의 『권학편』은 변화하는 중체서용론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장지동은 중국 학문과 서양 학문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수용해야 할 학문의 범위를 서양의 정치제도로 확장했다. 장지동의 중체서용론은 중국 학문을 개인의 내적인 문제로 한정하여 서양 학문의 수용 가능성을 무한정 확장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은 장지동이 중국의 문화 보존에 집착하는 양무파적 성격보다 개혁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이처럼 중체서용론의 단계적 구분과 특징 파악은 중국의 지식인들이 개혁을 어떤 방향으로 확대시켜 왔는가를 파악하고, 중체서용적 개혁 구상의 차이를 명확히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 31~32쪽/ 제1부 제2장_ 『권학편』의 국가 중건 구상과 문화 전환

공자는 노나라가 예의를 갖추고 있지만, 국력은 계속 약해져서 제(齊)나라, 주(邾)나라, 오(吳)나라, 월(越)나라 등이 무력으로 노나라를 모욕하니, 이 말로써 노나라 신민의 무지함을 깨고 노나라 선비들의 몹쓸 병을 없애서 노나라가 빨리 장래성이 있게 되어 문왕과 문왕의 성세를 회복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므로 배움이 없고 힘이 없고 부끄러움이 없다면 어리석고 약해질 것이고, 배움이 있고 무력이 있으며 부끄러움을 안다면 똑똑해지고 강해질 것이다. 노나라가 이와 같았는데, 70만 평방 리의 면적과 4억의 인민에게는 어떠하겠는가? _ 72~73쪽/ 제2부_ 권학편 서문

나는 오늘날의 세상 변동을 구제할 방법은 세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국가의 보존, 또 다른 하나는 성인 가르침의 보존, 마지막은 중화 종족의 보존으로, 무릇 세 가지는 하나로 통하는 것이다. 국가 보존, 성인 가르침 보존, 종족 보존이 하나의 마음으로 합쳐지는 것을 동심(同心)이라고 한다. 종족을 보존하려면 반드시 먼저 교리를 보존해야 하고, 교리를 보존하려면 반드시 먼저 나라를 보존해야 한다. _78쪽/ 제2부_ 권학편 상, 내편

지금 중국은 강성하고 힘 있는 나라는 아니지만, 백성이 여전히 생업을 잘 유지하고 있고 조정의 법률이 그것을 지탱하고 있다. 민권의 설이 퍼져나가면 어리석은 백성은 기뻐하고 불순한 무리가 활개를 쳐서 기강은 통용되지 않고 온 천지에 대란이 일어날 것이다. 민권을 주장한 사람이 어찌 홀로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또한 도시를 약탈하고 교회당을 훼손하면 외국 각 국가가 교민 보호를 명목으로 군함과 육군으로 깊이 쳐들어와 점거하여 모두가 그들에게 복속되는 것이 나는 두렵다. 이러한 민권의 설은 진실로 적들이 원하는 것일 뿐이다. _ 111~112쪽/ 제2부_ 권학편 상, 내편

학당의 비용은 지방의 신사와 부유한 사람들의 기부금으로 모으고 국가는 국고에서 약간의 보조금을 지불한다. 입학자는 학업을 이루는 것에 전념해야지 학습보조금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각 개인마다 매월 약간의 금액을 내서 식비와 교사 사례 비용으로 삼는데 가난한 집은 조금 내고 부잣집은 많이 납부한다. 관청과 신사가 학당 수립을 계획하여 마련한 비용은 학당 건립, 교사 초빙, 도서 구입과 기자재 마련 비용으로만 사용해야 하며 학생의 생활 보조나 장려금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_ 151쪽/ 제2부_ 권학편 하, 외편

예전에 북위의 태무제는 남조의 유유(劉裕)가 건국한 송나라를 발 없는 나라라고 조소했다. 이것은 양국의 승부수를 비교하여 북조는 말이 많고, 남조는 말이 없는 것을 말한 것이다. 만약 오늘날의 형세에서 바다에 군함이 없고, 육지에 철도가 없다면 역시 발이 없는 나라이다. 지금 철도를 만들려고 하는데 이미 많이 지체되었다. 만약 다시 우물쭈물하며 망설이면 아마도 다른 사람이 우리를 제치고 철도를 다 건설할 것이다. _ 193쪽/ 제2부_ 권학편 하, 외편

중국은 지금 처음으로 학당을 설립하여 들어가는 비용이 상당히 많으니 학생이 학비를 내게 하여 관청의 재정에만 기대지 않도록 해야 오래 지속되고 확충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학비는 모든 사람이 매월 약간씩을 내야 하는데, 각 성이 성의 재정 조달 상황을 고려하여 학당에 필요한 경상비를 계산하고 수시로 참작하여 결정하며, 납부액을 정해둘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학생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_ 242쪽/ 제3부_ 학무강요

 

출판사 서평

위기를 몰랐기에 맞이한 근대 중국의 위기,
장지동의 진단

근대 사회로 변화하면서, 중국은 왜 서양 열강에 뒤처지고, 중국의 학문은 위기에 대응하지 못해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른 것일까. 장지동은 중국이 여러 왕조를 거치며 하나로 통합된 이후 주변에 중국을 능가할 만한 경쟁 상대가 없으니, 문사 치장만을 중시하여 실력이 없어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중국은 지식의 개발이나 개혁을 하지 않고 옛 법을 그대로 지키며 간혹 수정하고 정돈해도 위기 없이 안심하고 유지할 수 있었으니 학문이 점차 쇠퇴했다. 그리고 아는 것이 없으니 할 일이 없으며, 하찮고 시시하게 일을 처리하여 졸렬하고 쓸모없는 것을 만들게 되었다. 중국이 인재가 넘쳐나던 때는 춘추전국시대와 삼국시대같이 경쟁이 상존하던 때였다. 경쟁이 인재를 키우고 지식을 개발하는 원천인데, 대일통(大一統)을 이룬 이후 주변에 경쟁할 만한 국가가 없던 중국은 안일하게 대처하며 지식을 개발하지 않았다고 장지동은 주장했다.

중국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교육받은 인재의 힘

그는 군중의 힘을 신뢰하기보다는 국가만이 이해 갈등을 통제하고 공적인 이익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군중의 이익 다툼과 이기적 활동을 막을 대안을 국가에 대한 신뢰로 연결시켰다. 또한 국가가 국난을 극복하는 핵심은 인재의 유무라고 파악했고, 사대부가 국가 개혁의 중심에 설 것을 요구했다. 사대부가 사적 이익을 넘어 국가의 공익을 추구하는 개혁을 담당할 적임자였다.
장지동은 중국 학문이라는 문화적 가치를 강조했고, 이 외에도 신문, 철도 등을 통해 중국인의 국민 의식 강화를 추구했다. 그가 강조한 신문 열람은 견문을 넓히고 기개를 양성하며 불명확한 논설을 없애 식견이 좁은 선비, 들판의 농부 모두가 중국에 관한 소식을 보며 중국이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었다.


장지동의 계묘학제,
중국 근대 교육체계를 56개 조문으로 만나다

1904년, 장지동은 1902년의 학제를 수정하여 새로운 학제를 만들었다. 이를 만들 때 영경, 장백희 두 명의 관학대신과 상의했다고 하나, 실상은 장지동 혼자 주도한 것이었다. 이것이 속칭 계묘학제로서, 1904년 1월 13일 발표하고 청 말까지 사용했다. 계묘학제는 22개의 장정으로 구체화되어 있었고, ‘학무강요’도 그중 하나로서 총 56개의 조문으로 구성되었다.
계묘학제는 사립학교에 대한 엄격한 통제, 여성교육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초등에서 대학까지의 교육기간이 너무 긴 등 여러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청 말까지 실제 운영된 학제이자 학교체계와 행정의 분리, 사범교육과 실업교육의 중시 등 중국교육제도의 근간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이를 살펴봄으로써 장지동이 주장한 중국 근대교육제도의 구체적인 실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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