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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박선영/글로컬 만주(한울아카데미, 2018)

작성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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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추천사 : 서기동래의 지정학_ 한석정
    책을 펴내며

    1장 | 만주 문제의 연원과 국제 학술의 장 IPR
    1. 왜 만주인가?
    2. 아시아ㆍ태평양학과 IPR
    3. IPR 연구와 만주 문제

    2장 | IPR 형성과 활동
    1. 민간 외교 시대와 상호 이해의 확대
    2. IPR 회의 조직과 의의
    3. IPR의 만주 관련 간행물

    3장 | 만주 문제와 1929년 IPR 회의
    1. IPR 회의와 중ㆍ일의 준비
    2. 역사와 사실 사이의 만주 논쟁
    3. 만주 문제 해결 방안

    4장 | 만주사변과 1931년 IPR 회의
    1. 제4회 IPR 회의 의제
    2. 만주사변과 국제연맹의 효용성
    3. 만주 논쟁의 효과와 의의

    5장 | 국제연맹 리튼 조사단 보고서와 각국의 반응
    1. 국제연맹과 만주사변
    2. 리튼 조사단 파견과 활동 내용
    3. 국제연맹 조사단 보고서에 대한 각국의 밤향

    6장 | 만주의 과거와 현재
    1. IPR과 국제연맹 만주관의 비교
    2. 학문과 정치의 경계
    3. 만주의 위상

    부록
    참고문헌
    영문 차례
    찾아보기

책 속으로

만주는 지정학적·전략적으로뿐 아니라 교통이나 경제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어, 동아시아 국가들은 만주를 차지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치열한 각축을 벌였다(박선영, 2001: 155~159). 따라서 만주에서 발생한 문제는 단시간에 온전히 해결될 수 없고 상황에 따라 여러 나라의 우호 관계를 깨뜨릴 수 있으므로, 세계사적으로 국제분쟁의 씨앗이 심긴 곳, 언제든 동아시아와 세계의 평화를 위협할 수 있는 곳, 아시아의 화약고, 제3차 세계대전의 전쟁터 등으로 이해되었다. _21~22쪽

IPR을 운영하는 목적은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의 상호 이해와 친선을 증진시켜 평화로운 관계를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약소국의 관점에서 보면 IPR이 내세운 의도는 현실과 부합되지 않았으며, 그들은 IPR이 감추고 드러내놓지 않는 내적 이익이 있다고 보았다. 당시 중국에서는 “제국주의의 대변자”, “제국주의자에 영합하는 주구”(劉馭萬, 1932: 1)라며 IPR을 비난했고, 조선은 “제국주의 편의대”, “제국주의 대변 기관”, “제국주의자의 어용 기구” 등 구체적인 이유를 들어 IPR 회의를 비판했다. _53쪽

들끓는 중국 내 여론으로 IPR 회의에 참석할 일본인이 위협을 당할 수 있다고 판단한 IPR 의장 제롬 그린(Jerome Greene)은, 당시 상하이에 체류 중인 위원만 참석하는 것은 어떤지 일본 IPR에 타전했다. 일본은 일본을 제외하고 IPR 회의를 개최하는 것은 규약 위반이라고 하면서 항저우가 위험하다면 상하이에서 개최하든가 호놀룰루에서 개최하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하는 등 참여 의사를 강력히 밝혔다(「太平洋會議開催中止」, 1931: 193~194). 중국은 그동안 항저우에서의 IPR 회의를 준비해왔으므로, 장소를 변경해 개최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1931년 10월 13일 상하이 캐세이 호텔에서 중앙이사회를 열어, 중국의 IPR 회의 중지 제안을 철회하고 예정대로 1931년 10월 21일부터 11월 2~3일까지 상하이에서 회의를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_152쪽

이런 가운데 1931년 6월 나카무라 신타로(中村震太?) 대위 살해 사건이 발생했다. 니가타현(新潟縣) 출신의 육군참모 나카무라 신타로 대위와 다른 3명이 1931년 6월 27일 군용 지지 작성을 위해 농업기사로 신분을 위장해 중국의 출입 금지구역인 다싱안링(大興安嶺) 동측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잡혀 총살된 사건이다. 또한 1931년 7월 2일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춘현(長春縣) 만보산 지역에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이 대립해 유혈 사태로 번진 만보산(萬寶山) 사건이 발생했고(Sunyoung, 2016), 만보산 사건이 와전되면서 조선에서 화교들이 공격당하는 배척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게다가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라는 무력 점령이 이어지자, 제4회 IPR 회의에서 만주 문제를 논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_154쪽

종합적으로 보면 중국은 만주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역사를 근거로 삼지만 일본은 현상(사실)에 초점을 맞췄으므로, 문제 인식의 출발점부터 차이가 있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중국은 주권국가로서 만주의 중동철도에 주권을 행사하고 싶어 했고, 일본은 국제법에 의존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했다(Wright, 1930a: 455). 일본은 만주가 비록 중국에 유리하지만, 일본이 만주에서 철도부설권을 갖고 이민을 통해 사회를 안정시키며 군대주둔권을 행사해 책임 경영을 한다면 양국 모두에게 이익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은 일본이 만주를 내정 간섭하고, 토비를 창궐시켜 치안을 교란해 궁극적으로 중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것(徐淑希, 1978: 183~184)으로 보았다. 결국 명확한 근대법적 근거 여부와 이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불거진 논쟁은 합의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평행선을 달렸다. _172쪽

리튼 조사단의 보고서는 침략과 저항의 확대라는 두 가지 문제를 야기했다. 국제연맹의 중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일본은 이를 계기로 국제연맹 탈퇴를 선언하며 세계 정복의 꿈을 더욱 확대시켜갔다. 반면 국제연맹의 힘을 빌려 주권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해보려 했던 중국의 국민들은 자신들의 힘을 통해서라도 주권을 지켜야겠다는 일념으로 항일운동에 참여했다. 공산당 토벌에 주력했던 국민정부조차 시안(西安)사변과 중·일전쟁 발발이라는 위기에 몰리자, 결국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운동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_239쪽

역사적으로 인식한 만주, 1920년대 IPR과 국제연맹이 논의했던 만주, 1945년 시점에 중화민국 외교부가 인식했던 만주, 국공내전 시기와 한국전쟁 시기에 중국공산당이 인식한 만주, 21세기 동아시아 각국이 인식한 만주 등 시대와 상황에 따라 내용은 다르지만, 전략적·지경학적 요지라는 점에서 맥을 같이했다. 동아시아 국가의 각종 프로젝트가 만주에서 진행되고 있고, 특히 대표적인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과 러시아의 신동방정책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볼 때, 과거에도 그랬듯이 만주는 여전히 글로벌한 만주로서 전략적 요충지이자 ‘변동의 핵’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만주의 세계성을 고려할 때 “만주를 장악하는 자가 세계를 장악한다”(趙?文, 1981: 7)는 말은 동아시아 정세 속에 여전히 건재를 과시하면서 우리에게 더욱더 깊이 있는 성찰을 요구한다. _280쪽

 

출판사 서평

국제 학술의 장 IPR과 국제연맹 리튼 조사단이 논의한 만주를
오늘의 시선으로 재해석한다

이 책은 한마디로, 만주의 위상과 관련된 글로컬 차원의 논구라 할 수 있다. 박 교수는 만주의 정치적·경제적·지정학적·전략적 가치를 정당하게 부각하고 있다. 이 책은 만주가 지속적으로 동아시아의 협력과 갈등 요소가 될 수 있음을, 언제든 세계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할 수 있는 곳임을 보여주어, 글로컬 차원의 관심을 경주하도록 이끈다. _동아대학교 총장 한석정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관한 IPR과 국제연맹의 논의 자료를 통해 20세기 만주의 글로벌 지정학을 세밀하게 탐구한 연구서로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_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박명규

17세기 청조의 발흥과 중국 정복,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동진, 20세기 전반 러·일 간 쟁패와 조선 병합, 일본의 만주 점령과 뒤이은 중일전쟁, 일본판 동서양 ‘최후의 전쟁’인 태평양전쟁, 냉전시대에 강국이 된 러시아의 참전 등 동아시아와 세계의 판을 뒤엎는 폭풍은 만주에서 발원했다.
이 책은 역사적인 차원에서 동아시아의 발칸이라 할 수 있는 만주의 국제성을 부각했다. 구체적으로는 세계적인 민간 학술 기구 IPR과 국제기구 국제연맹에서 만주가 논의된 방식, 만주 문제의 역사적 기원, 만주에서 논쟁이 되는 각종 사안, 만주 문제 해결 방안을 중점적으로 고찰했다.

국제 학술의 장, IPR에서의 만주
IPR은 1925년 미국 YMCA의 주도로 탄생해 미국, 소련, 영국 등 세계열강과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들이 참가해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를 선정해 조사·연구하고 토론 활동을 했던 국제적 민간 학술단체이자 비정부기구의 효시로 평가받는다. IPR은 미국을 휩쓴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인 매카시즘(McCarthyism)으로 1960년대 초에 해산되기까지 다양한 학문적 성과를 냈다. IPR의 목적은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의 상호 이해와 친선을 증진시켜 평화로운 관계를 공고히 하는 것이었으나, 조선과 중국 등지에서는 “제국주의의 대변자”, “제국주의자에 영합하는 주구”, “제국주의 편의대”, “제국주의 대변 기관”, “제국주의자의 어용 기구”로 비판받기도 했다. 그러나 IPR은 30여 년간의 성과를 각종 조사보고서와 연구서, 팸플릿 등 다양한 자료로 출간해 학문 창출에 크게 기여했다.
평생 만주를 연구한 저자가 주목한 IPR의 제3회 교토 회의(1929)와 제4회 상하이 회의(1931)는 만주에 대한 중국의 주권과 일본의 철도부설권, 군대 주둔 등을 놓고 양국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에 열렸다. 이뿐 아니라 4회 회의는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직후에 열려, 개최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저자는 일본의 팽창으로 세계적 분쟁의 핵심이 된 만주에 대한 회의 참석자들의 인식과, 중국과 일본의 대립상, 이에 대한 조선의 인식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인식을 각종 자료를 분석해 세심하게 풀어냈다.

국제연맹에서의 만주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한 후 중국이 문제의 해결을 호소함으로써 국제연맹에서 본격적으로 만주 문제가 논의되었다. 리튼 조사단을 파견해 만주 문제를 조사하고 보고서를 작성하게 했을 뿐 아니라, 상하이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이를 만주 문제의 연장선으로 보고 조사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해 일본이 상하이에서 철수하는 결과를 도출하기도 했다. 리튼 조사단의 보고서가 일본의 권익과 법적 효력을 일정 정도 인정하기도 했지만, 이 보고서를 근거로 발의된 국제연맹의 권고에 반발해 일본은 국제연맹 탈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했다.
법적 구속력이 없고, 미국과 소련이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재 이상의 강제력은 발휘할 수 없었던 국제연맹은 1930년대 이후 계속된 국제적인 분쟁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고, 제2차 세계대전을 억제하는 데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해 1946년 4월 21일 마침내 해체를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저자는 국제연맹이 만주에 대해 취한 일련의 조치와 그 과정에 대한 연구를 통해 비록 효용성이라는 면에서 여러 문제를 노정하기도 했지만, 국제적인 합의를 통해 세계 평화를 도출하려 했다는 데 의미를 부여한다.

군사적 분쟁지에서 경제적 협력지로
저자는 역사학의 영역에서 다소 배제되고 있는 최근의 상황도 빼놓지 않고 다루었다. 국제무대에 만주가 오르내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만주는 일국사의 일부가 아닌 세계사의 관심지로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글로컬 만주라는 이 책의 제목은 이와 같은 만주의 성격을 담고 있다.
현재 만주는 전략적 요새, 경제적 보고, 교통의 요충지로서 각국의 각종 발전 프로젝트가 이 지역을 중심으로 가동되고 있다. 과거에는 군사적 분쟁 지역이던 이곳이 미래의 발전을 놓고 협력의 땅으로 변모한 것이다. 물론 협력의 기류는 언제든 갈등 분위기로 돌변할 수 있다. 그러므로 통일을 지향하는 한반도라면 만주와의 관계를 역사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지정학적·지경학적 그리고 미래 전략적인 차원에서 고려해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한국연구재단과 지역학을 선도하는 하버드 옌칭 연구소의 지원을 받아 5년간의 노고로 완성된 이 책이, 세계를 보는 더 넓고 더 견고한 시각을 기르는 데 마중물이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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