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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학회견문기> 2004년 6월 정기 학술 발표회를 보고 나서

작성자
이병인
작성일
2004.07.08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591
내용
지난 6월 26일에 대전의 목원대에서 열린 중국근현대사학회는 몇가지 면에서 의미가 있었다. 그 하나는 적어도 이 학회의 출범 이후에 처음으로 이른바 지방에서 학회를 개최하였다는 점에 있다. 이제껏 중국현대사의 경우, 출범 이후 서울을 떠나지 않은 채 그곳을 무대로 활동하여 왔다. 물론 서울이 학문의 중심이고, 중국사 연구 역시 이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이번에는 적어도 명색이나마 '전국적'인 타이틀에 맞추기 위해 中都로 알려진 대전에서 개최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목원대에 계신 도중만 교수께서 힘을 많이 써 주셨다. 또한 경향 각지에 계신 회원들께서 힘든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와 주신 덕택에 성황리에 잘 치를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참석하신 여러 분들에게 크게 감사를 드린다.

또한 나는 이 회의에서 명망 있는 연구자, 곧 모리스 마이스너 교수를 만나 그분의 연구 성과에 대해 간략하지만, 의미 있는 이야기를 들은 것에 감사를 드린다. 그 분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모택동 사상이나 이대조와 같은 공산주의자들의 연구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낸 분이다. 나 역시 그의 책, 특히 <모택동 사상과 맑시즘>이란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 분은 이번에 그의 제자인 김수영 국민대 교수의 초빙으로 한국에 온 것으로 알고 있으며, 그 덕에 근현대사학회에서도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인 Mao's China and After: A History of the People's Republic 중국어판을 최근에 홍콩대학에서 출간하였다. 이번 특강은 이 책의 서문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목원대 부근의 한정식 식당에서 본 그 분의 건강은 좋지 않았다. 걸음걸이가 불편하였을 뿐만 아니라 듣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동행한 김교수의 말로는 전에 뵈었을 때보다 훨씬 안 좋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특별히 그 분을 위해서 따로 준비한 식탁도 없었다. 그저 우리와 같은 식단, 곧 쌀밥에 된장, 그리고 김치 세 종류(배추, 무, 그리고 무엇이더라?), 호박전, 깻잎, 게장 등등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불편한 양반다리를 하면서 저것을 제대로 먹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앞섰다. 더구나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한 시간 여 정도를 이야기하여야 한다는 마음이 들자, 자꾸 조바심이 났다.

그런데 웬걸. 마이스너 교수는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한국식 음식을 먹어 본다면서 우선 된장이 맛나다는 것이었다. 이어 김치에 호박전 등을 서투른 젓가락질로 잘도 드시는 것이었다. 최종에는 매콤한 게장까지..... 결국 그의 건강과 입맛을 걱정한 것은 하나의 기우였다. 자신은 한국 음식이 입맛에 매우 맞는다는 것이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일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이제껏 이 사실을 잘 알지 못하였던 김교수도 앞으로는 한국 식당에 자주 가야겠다는 말을 하면서 안도하는 것이었다. 배경한 교수도 경주에 가면(마이스너 교수는 경주에 갈 예정이었다), 어느 한국식 식당이 좋은지를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요컨대 그 분의 이야기는 오늘날의 강대국 중국은 공산혁명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중국에서 전개되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대립을 중요한 모순으로 여기고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모순은 혁명 주체의 목표와 그들의 처한 객관적 조건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특히 경제적 후진성 때문에 중국 혁명은 부르조아의 범주에 제약을 받았으며, 그 까닭에 그것의 사회적 성과는 사회주의라기 보다는 자본주의였다는 것이다.

이 책이 완간되던 1998년 무렵에 이르면 중국경제는 국유기업의 사유화, 외국 자본의 투자 확대, 경제 정책의 결정에 있어서 이익의 중요성, 지식인들의 자유주의적 경제 규범, 불평등의 증가 등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자본주의적 성격이 확연해졌다. 따라서 모택동의 혁명을 실패하였다고 말하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성취는 1) 외세로부터의 독립, 2) 국내 정치의 성공, 3) 1950년대 초의 농업혁명- 지주 소멸, 4) 산업화 등으로서, 이러한 성공은 나쁜 조건 속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이러한 성취물들은 실제로 국민당이 추구한 목표이기도 하였지만, 국민당은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기반으로 인해 농촌에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부르조아적 혁명의 결과는 사회적 분열을 야기하기도 하였으나 이것 역시 혁명 중국이 안고 있는 역사적 과제라는 것이 마이스너 교수의 논점이었다.

우리는 흔히 중국 사회의 모순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에서 찾는다든가, 모택동의 실험을 실패로 보는 데 익숙한데 그는 이러한 관점에 비판적이다. 흥미있게도 그는 중국이 이룩한 사회주의의 성과를 자본주의적 사회에서 찾는 것이다.

발표에 뒤이은 질문에서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피력하였는데, 이 부분에서 특기할 것은 뒤에 유일고 교수가 말한바와 같은 문화대혁명에 대한 이상주의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존재한다는 점이다. 특히 79년 이후의 민주화 운동에 이 혁명의 이상주의가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그것이 89년의 사건에도 영향을 미쳤는지가 궁금하였으나, 시간 관계상 그 질문은 하지 못하였다.

이번 토론회에서는 차경애 교수께서 의화단 사건이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도 다루었다. 종전까지 거의 생각해 보지 않던 주제였기에 멍한 느낌이 들었다. 의화단 사건은 청국과 열강 사이의 일이라고만 생각해 온 탓이다. 약소국으로서의 대한 제국이 거기에 다시 보조 배우로서 등장하였다. 우리가 일국사적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그 외에도 문화대혁명에 대한 유일고 교수의 연구도 참고할 만하였다. 문화대혁명에 대한 연구를 자국 역사가가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쉬운 작업은 아닐 터인데, 저 정도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조건이 된 셈이다. 그것이 중국이다. 상해에 집중되어 있던 근대 도시 연구도 이제 천진을 비롯한 다른 도시로 옮겨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호현 선생은 상해와 천진의 자치를 비교하였는데, 특히 천진이 북경의 관문이었던 만큼 국가적 영향이 컸던데 비해 상해는 그렇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인민대학의 진용근 교수는 국민정부 시대의 경제 구조에 대해 경제 이론을 도입하여 발표하여 주었다.

이번 발표회에서 보고 느낀 것은 이제 '지방 발표회'도 가능하다는 것이었고, 또 회의장을 덮고 있던 진지함과 활기였다.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준비해준 분들과 참여자에게 고마웠다. 그리고 참석은 하지 못하였을지라도 멀리서 격려를 보내준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중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때이니만큼, 중국근현대사 연구도 그만큼 더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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